| 1970년 3월, 회사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하고 부지 선정 등 기초 작업을 가동시켰다.
내가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하자, 회사 내부에서도 우리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조선소를 꿈꾸느냐는 회의론이 만만치 않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차관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지, 차관만 해결된다면 조선소를 지어 배를 만드는 일은 어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덩치의 탱크가 바다에 떠서 동력으로 달리는 것이 배지, 배가 별거냐는 생각이었다.
조선업의 경험은 없었지만 그 동안 여러 종류의 건설을 하면서 체득한 경험으로 철판에 대한 설계나 용접은 자신이 있었고, 내연 기관(內燃機關)을 장치하는 것도 별거 아니었다. ‘이를테면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 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는 것이고, 내부의 기계 장치는 건물에 냉온방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선박도 기계 도면대로 제 자리에 설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말하자면 나는,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다.
각종 산업 플랜트 건설을 하면서 그 동안 각 분야의 기술을 습득, 축적해온 우수한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선박 만들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할 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또 내가 일찍부터 조선소에 대한 꿈을 품었던 것은 조선 사업과 건설 사업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추세가 그러했고 특히 일본의 조선소는 건설에서 못하는 기계, 전기 분야를 전적으로 지원하면서 건설 공사 수주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연간 2억 달러 어치의 배를 만드는 일본의 한 조선소는 철구(鐵構) 사업으로도 2억 달러를 벌고 있었다. 조선소를 갖고 있으면 철강 구조 사업도 할 수가 있고, 플랜트 건설 분야에서의 ‘현대’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해줄 것이고, 송전선 철탑 공사, 교량 공사에도 동원할 수 있었다.
조선소 건설이 장차 ‘현대’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번 작정한 일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은 나에게 전혀 장애가 안 된다.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어코 해내고 말겠다는 결심은 더 굳세지고, 따라서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더 더욱 치열하게 할 수밖에 없어진다.
돈을 꾸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우리는 메리도라는 유대인을 만났다. 그는 그전에도 우리 나라의 경제 차관을 많이 주선해주었던 거상(巨商)인데, 반면에 크게 ‘바가지’도 많이 씌웠던 사람이다. 어찌 됐든 놀라운 수완과 남다른 경제 정보로 거부가 된 인물이다. 이 사람을 나는 뉴욕에서 만났는데, 그는 아주 편안하게 출자 약속을 하고 거기다 우리가 만든 배를 전량 다 무조건 사줄 테니 척당 1할의 이익금을 내라고 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에 ‘동쪽에서 귀인(貴人)이 나타난다’는 구절이 있었다던가, 우리한테는 그 사람이 『토정비결』 속의 ‘동쪽 귀인’이었다. 뉴욕의 그 사람 사무실에서 차관도 그가 주선하고 배도 그가 다 사준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만들었다. 내가 계약서 맨 마지막에 한 조항을 추가하자고 요구했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발생되는 모든 비용은 각자 부담하기로 하고 여하한 이유로도 소송은 제기하지 않는다.’ 라는 조항이었다. 계약 조건이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 뭔가 한구석에서 자꾸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동쪽 귀인’이 ‘동쪽 귀신’이 되면 큰일 아닌가. 너무 달콤한 내용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더구나 사업에 있어서는 달콤하기만 한 사탕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생면부지의, 더더구나 능수능란하게 ‘바가지’도 잘 씌우는 것으로도 소문난 유대 상인이었다.
내가 그랬더니, 메리도는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내가 딱하다는 얼굴로 노르웨이의 어떤 잡지에 난 자기 기사를 보여주었다. 같이 참석하고 있던 중역이 보더니 ‘노르웨이에 메리도가 오면 동쪽 바다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다’는 등의 기사라고 했다. 메리도는 노르웨이 조선소에서 배도 많이 사준 사람이고 노르웨이에서 냉동선을 많이 갖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메리도가 말했다.
“소송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다. 그러니까 이 조항은 빼자.”
내가 우겼다.
“소송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계약을 할 때는 통상 이렇게 한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하자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당신을 못 믿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며 우리 비용을 당신한테 청구할 의사도 없다. 그러니 이 조항은 사실 집어넣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설왕설래하다가 결국은 내 고집대로 마지막 조항을 추가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이 조항을 추가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세계 시장을 상대로 배를 팔아야 하기 때문에 조선소 사장도 그에 걸맞게 세계적인 조선소 ‘아카(Aker)’에서 시엠이라는 사람을 발탁했다. 그런데 그 후 가만히 보니, 사장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메리도가 그 뒤에서 차관 문제뿐만 아니라 물자 구매와 처리까지 다 주무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시작할 때부터, 계획서에는 5백만 불이면 될 일에 1천만 불 정도가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그 중에서 5백만 불은 자기가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이것은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이 후진국을 상대로 다반사로 해온 수법이다. 우리가 메리도의 기자재 도입의 독단 처리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그와의 계약은 파기돼버렸다.
그런데 ‘소송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멋들어진 말을 했던 메리도가 계약이 파기되면서 즉각 소송을 걸어왔다. 그렇지만 내가 우겨서 추가했던, ‘어떤 경우에도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단서 조항 때문에 우리는 손해를 볼 필요가 없었다.
메리도와의 계약 자체는 파기되었지만 그러나 그와의 접촉에서 나는 중요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메리도는 차관 주선을 하는 데도 차관을 전문으로 주선하는 세계적인 브로커와 연결되어 그들과 손잡고 있었다. 이 브로커들도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그야말로 속속들이 다 갖고 있었다. 세계의 조선 시장이 장차 나갈 방향은 물론 각 조선소들의 생산 능력, 각국의 향후 주문량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앞으로 기름을 실어 나르는 VLCC(초대형 유조선)를 만드는 조선소가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그들의 분석을 ‘현대조선소’가 나중에 참고하기도 했다. 그들의 정보 수집 능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큰 기업이 발전하는 데 산업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메리도에게서 크게 배웠다.
메리도와 결별하고 우리는 데이비스라는 차관 주선인을 만났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韓國戰)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그는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프랑크푸르트에 사무실을 내고 있었다. 그 사람 사무실에 가보고 나는 그가 국가간의 중요한 산업 정보도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았고, 세계 모든 산업은 거의 그런 정보원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쨌든 데이비스는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가 몇 년을 쫓아다니면서 애썼던 차관 문제를 데이비스는 6개월 만에 모두 해결해주었다. 그는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영국의 버클레이즈 은행, 본(Bonn)의 스위스 은행 등의 차관을 끌어들였는데, 우리가 접촉할 금융인들의 성격까지 예리하게 파악해 조언해주었다. 그는 어디의 누구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 얘기하면 얼마까지는 얻어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해주었는데, 그것은 그 후 마치 미리 짜맞춰놓은 것처럼 맞아떨어졌다.
금융 브로커 데이비스의 주선으로 1971년 9월, 영국의 A&P 애플도어 사 및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사와 기술 협조 계약을 맺었다. 애플도어 사와 만나기 전에 우리는 일본은 물론 이스라엘의 기술 회사와도 접촉을 했었고, 서독의 아베게서 조선사와는 기술 공급, 기술 제휴를 거의 합의까지 했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시간 때문이었다. 서독 사람들은 조선소의 레이아웃 작성까지 1년 반에서 2년의 시간과 기술료 5백80만 달러를 요구했다. 돈이 비싼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나의 급한 성격에 레이아웃 나올 때를 1년 반에서 2년이나 기다릴 수도 없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조선소의 건설 추진 속도에도 맞지가 않았다.
데이비스가 연결시켜준 애플도어 엔지니어링은 영국의 몇몇 조선소에서 뛰쳐나온 유능하고 의욕적인 젊은이들 몇이 만든 기술 회사였다.
“기계, 건축, 토목 분야에서 유능한 한국 엔지니어 몇 사람만 보내주시오. 그러면 그 사람들과 함께 작업해서 6개월 안에 레이아웃을 완성시켜주겠소.”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조선소 레이아웃을 완성시킨 다음에 기술 문제는 어떻게 할 거냐?” 했더니, 영국 글래스고우에 있는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소에서 현재 27만t급 유조선을 만들고 있는데 그곳에서 우리 ‘현대’ 사람을 6개월씩 2차례에 걸쳐 훈련시켜주겠다고 했다. 1차로 전갑원, 이정상, 김형벽을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소로 보냈고, 2차로 백충기와 또 다른 기술자를 보냈다.
기술 협조 계약을 마무리짓고는 차관 도입이라는 난제를 풀기 위해서 곧장 런던으로 가 A&P 애플도어 사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도움을 청했다. 버클레이즈 은행은 정희영 상무가 앞서 교섭을 했으나 반응이 별무신통이던 은행이었다. “아직 선주도 나타나지 않고 한국의 상환 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곤란하다”는 롱바톰 회장의 대답이 나를 맥빠지게 했다.
나는 그때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백 원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거북선 그림을 앞면으로 테이블에 펴놓았다.
“이것을 보시오. 이것이 우리의 거북선이오. 당신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우리가 당신네보다 3백 년이나 조선 역사가 앞서 있었소. 다만 그 후 쇄국 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우리의 잠재력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소.”
롱바톰 회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결국 한국의 ‘현대건설’은 현재 고리원자력을 시공하고 있고 발전 계통이나 정유 공장 건설에도 풍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형 조선소를 만들어 큰 배를 건조(建造)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소에서 선박 도면을 제작해서 버클레이즈 은행에 제출했다.
롱바톰 회장의 도움으로 버클레이즈 은행과 차관 도입 협의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선 관계자들을 우리 나라에 보내 우리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들을 조사하게 했고, 우리의 모든 인원과 기술자들을 재교육 훈련시키면 선박 건조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냈다.
또 한 차례 버클레이즈 은행의 심사를 거친 후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는 런던 은행계는 완고한 보수성과 고집스러운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곳이다. 신규 차관 신청서를 놓고 종횡 무진의 정보 분석과 현지 답사, 거듭되는 이사회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일체의 동양식 막후 접촉이나 정치적 압력을 완벽하게 금기시하고 배제했다. 무서운 시험대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점심 약속 하루 전,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이나 재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자고, 셰익스피어 생가(生家)와 옥스포드 대학을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 궁을 보았다.
이튿날, 우리는 격조 높은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수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정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주 짧은 순간 아찔했지만 태연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낸 사업 계획서를 보았습니까?”
보았다고 했다.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포드 대학 졸업식을 본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냥 “어제 내가 그 사업 계획서를 들고 옥스포드 대학에 갔더니 한번 척 들쳐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하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옥스포드 대학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 계획서는 못 만들 거요. 당신은 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당신의 전공은 유머 같소.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 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내겠소. 행운을 빌겠소.”
점심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으나 그것으로 차관 도입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넘어야 할 험난한 산이 또 있었다.
영국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만약에 우리가 상환 불능의 상태가 되더라도 은행의 손해가 아니라 보증을 선 영국 정부의 손해로 처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ECGD의 보증이 없는 차관 도입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버클레이즈 은행이 제출한 서류가 ECGD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기만을 우리는 목젖이 아프게 빌었다. ECGD의 보상 책임을 보증하는 이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가 아니라 코끼리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와 같았다. 버클레이즈 은행의 베네트 부장이 고맙게도 ECGD 총재와의 면담을 주선해주었다.
“우리는 우리 나라의 권위 있는 기술 회사가 당신네들이 배를 만들 수 있다는 판정을 한 것을 믿소. 또 세계 5대 은행 중의 하나인 버클레이즈 은행에서도 당신들이 배를 만들어 팔아서, 그 이익금으로 원리금을 갚을 능력이 있다고 하니 그 점에 대해서도 이의가 없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소. 만약에 당신네한테 배를 주문할 선주(船主)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내가 배를 살 사람이라면,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만 불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치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는 당신네 배를 사지는 않을 거요. 조선 선진국의 배를 사지 무엇 때문에 당신네 같은 나라의 배를 사겠소. 더구나 외상 거래도 할 수 없는데.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배를 만들어 쌓아놓는다 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거요?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가 없소.”
정확한 지적이었다. 우리 나라는 너무나 가난한 나라라서 기업이 1백만 불만 필요해도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만드는 배를, 그것도 4,5천만 불짜리 배를 사갈 정신나간 사람이 어디 있나. 더구나 그렇게 큰 배라고는 만들어본 경험도 전혀 없는 나라에서 말이다. 나라도 그런 얼빠진 짓은 안 할 터였다. 더 할말도, 더 비집고 들어갈 염치도 없어서 그저 간단하게 “알았습니다.” 하고는 면담을 끝내고 나왔다.
나보다 더 미친 사람
그날부터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다.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초라한 백사장 사진과 1/50,000짜리의 그 지역 지도 한 장, 그리고 스코트 리스고우에서 빌린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을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한테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다.” 라고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십상인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처가(妻家)의 고향이 그리스라는 애플도어 롱바톰 회장을 만나 내 딱한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롱바톰 회장이 “내가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리스 선주를 잡아보자.” 며 나서주었다. 롱바톰 회장의 주선으로 우리한테서 배를 사겠다는, 나보다 더 미친 선주를 찾아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애플도어에서 영업하는 사람과 리바노스가 영국의 이튼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는데, 그 동창생이 ‘현대’에서 배를 사면 아주 싸게 살 수 있다고 리바노스를 설득했다고 한다.
리바노스가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하는 것이 파격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 내건 조건도 파격이었다.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 인도하겠다, 만약에 이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준다는 것을 은행에 지불 보증하겠다, 배를 앉아서 찾을 수 있게 해주고 배값도 싸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으며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 상황을 봐서 조금씩 배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다 돌려주겠다.’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 사람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다.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14억 원을 수표로 받아 우리 나라 한국은행에 입금시켰는데 그것이 1970년 12월 5일이었다. 리바노스한테서 받은 계약금이 입금된 서류를 ECGD에 내놓았더니 그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해졌고, 그리고는 두말없이 결재를 해주었다.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에서의 차관 도입이 성사되고 나자, 그 후 스페인과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다른 유럽 국가 은행에서의 차관은 훨씬 용이했다.
영국에서의 차관 도입을 매듭짓고 귀국해서 김학렬 부총리한테 연락을 했더니 그는 거두절미하고, “내 목이 붙어 있을 거냐 날아갈 거냐”를 물어왔다. 목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더니 부총리는 너무 좋아하면서 대통령한테 즉각 보고한다고 하더니, 정말 즉각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대통령은 차관만 해결한 게 아니라 배도 2척 주문받아 왔다니까 파안대소를 하면서 그토록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정부가 적극 도와줄 테니 곧장 기공식을 하라고 했다.
사실은 그때까지 부지 매입도 제대로 안 돼 있던 상태였다. 내가 들고 다녔던 백사장 사진은 그저 조선소를 짓는다면 그 자리가 좋겠다고 우리끼리 정해놓았던 장소였다. 이제야 말이지만 우리는 차관으로 들여온 돈으로 부지 매입을 시작했다. 꽁지에 불붙은 것 모양 부랴부랴 땅을 사들였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땅값도 쌌다.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샀다. 땅투기한다고 난리가 났지만 조선소를 지으려면 1백만 평은 넘어야 할 것 같아 누가 뭐라 하든 들은 척도 않고 열심히 샀다.
문산에서 고속도로 1차 공사를 막 끝낸 매제 김영주 상무를 불러들였다. 고장나 꼼짝도 안 하던 기계가 김영주가 다가가기만 해도 저 혼자 굴러간다는 말들을 할 정도의 기계 박사인 매제 김영주는 신설동 ‘아도서비스’부터 평생을 나와 함께하고 있는 ‘현대’ 역사의 가장 중요한 증인의 한 사람이다. 불려 들어온 김영주에게 조선소를 지어야 하니까 울산으로 내려가라고 했더니 “예, 알겠습니다. 내려가겠습니다.” 두말없이 간단히 그렇게 대답했다. 김영주는 내 매제가 되기 전 총각 시절부터 평생을 통해서 내가 어떤 지시를 내리든, 무슨 일을 시키든, 단 한 번도 군소리를 붙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예,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평생을 이 간단한 대답으로 내 뜻을 따라준 김영주는 그렇게 대답한 일은 또 훌륭하게 잘 수행해낸 아주 머리가 좋고 능력 있는 인재다. 내가, “세계 도크 건설의 70%를 하고 있는 일본 카지마(鹿島)는 하루에 3천㎥씩 물량 처리를 한다고 하니 우리는 최소한 2천㎥는 처리해야 체면 유지가 되는 거 아니냐?” 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일본인들이 쓰는 장비를 주신다면 저도 3천㎥하겠습니다.”
그때의 회사 재정 상태로는 그런 장비를 수입해서 투입할 형편이 아니었다. 김영주는 고속도로에서 쓰던 낡은 장비를 끌어내 전부 수선해가지고 울산으로 내려가 도크를 파기 시작했다.
도크 파기가 시작될 때, 카지마의 겐조 회장과 나의 친분으로 카지마에서 부장급 두 사람이 와서 시공 자문을 해주었다. 그런데 시공 자문을 해주러 왔던 이 일본인 두 사람이 매제 김영주한테 질려서 한 달 반 만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자기네는 그 좋은 장비로 24시간 작업에 3천㎥의 물량을 처리하는데, 내 매제는 수리한 구식 장비로 같은 시간에 4천5백㎥의 물량을 처리해냈기 때문이다.
| 세계 조선사에 기록을 남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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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3월 23일, 8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현대조선소’ 기공식을 했다. 조선소의 도크 파기는 그 하루 전인 22일부터 시작했다. 그 동안 세상을 떠난 김학렬 부총리의 후임자 태완선 부총리를 대동하고 박대통령이 기공식에 참석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때까지 대통령이 기공식에 참석한 것은 포항제철말고는 없었다.
대통령은 연설에서 원고에도 없었던 주민에의 당부를 따로 각별하게 했었다.
‘여러분들의 자제들은 바다에 나가 풍랑과 싸워가면서 어렵게 고기를 잡다가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 조선소가 건설되면 앞으로는 모두 다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모든 주민과 어민들은 적극 협조하기를 바란다.’
이런 요지였다. 공연히 데모 같은 것 해서 발목 무겁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황무지에 천막 하나 쳐놓고 했던 기공식이라 점심 식사를 대접할 장소도 없었다. 대통령은 기공식이 끝난 후 대구로 옮겨 관구 사령관들과 저녁을 했다고 하는데 전해 듣기로, 저녁 식사 후 술좌석에서 태완선 부총리가 “조선소, 그거 어디 되겠습니까, 각하? 제가 보기에는 될 것 같지 않습니다.” 했더란다. 그러자 대통령이 들고 있던 술잔을 소리 나게 놓으면서 “담당 부총리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되는 일이라 격려하면서 지원을 해야지, 생각 없이 하는 그런 말들이 바로 일을 어렵게 만든다는 거 모르시오? 앞으로 그런 말 다시는 입 밖에 내놓지 말고 모두 다한테 그 조선소는 반드시 된다고 말하시오.” 하며 서릿발 같은 호통을 쳐 술자리가 단번에 얼음판이 돼버렸다고 한다.
새삼 말하지만 박대통령의 경제 발전에 대한 집념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만성적 인플레 속에서 조선소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 수지맞는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 경기는 2,3년으로 내리막일 것이라는 정보도 있었다.
빚진 돈의 원금은 어김없이 이자를 낳고 그 이자는 또 이자를 낳는다. 공사 기간도 짧지가 않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소 건설로 인해 기업을 부실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명제였다. 방법은 한 가지뿐, 우선 빨리 만들어놓고 일해가면서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선소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국내 공사의 수주 활동을 거의 다 제한시키고, 미군 공사는 이미 그 전해 연말로 종결을 지었다. 도크를 짓는 한편으로는 우리 힘으로 진입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도로 깔기를 비롯한 간접 자본 분야에서부터 관계 부서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 예산 미달을 이유로 자꾸만 지연되는 것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진입 도로를 우리가 만들기 시작하자 관에서는 사전 공사는 위법이라는 경고를 내렸고 미래를 계산한 공업 용수 5배 초과 확보 관철도 힘이 들었다.
직원들이 송사(訟事)에 얽혀들어 애를 먹기도 했고, 대통령이 적극 지원하는 일인데도 사업 타당성에 의심을 가진 도시계획위원회는 ‘현대조선’ 사업본부를 뻔질나게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수개월에 걸친 도시계획위원회와의 실랑이로 헛된 기운을 뺏는데, 세평(世評)조차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한테는 일단 시작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누구도 못 말리는 ‘왕고집’이 있었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으며, 신념이 있는 한 멈출 수 없었다. 안벽(岸壁) 매립, 강재(鋼材) 하치장, 선각(船殼) 공장, 기능공 훈련소, 본관 공사가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매일 2천2백 명이 넘는 작업 인원이 들러붙었다. 조선소 건설에 착수하자마자 나는 기능공 훈련소부터 지어서 모집해들인 기능공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대학 출신의 기계, 전기, 내장(內粧) 등을 할 인원 60명을 계열사에서도 뽑아오고 밖에서도 데려다가 영국의 스코트 리스고우에 보내 6개월씩 훈련을 시켜 데려오곤 했다.
우리는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2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 평의 공장을 지었다. 최대 선(船) 건조 능력 70만t, 부지 60만 평, 70만t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1단계의 준공을 본 것이 1974년 6월.
기공식을 했던 1972년 3월로부터 2년 3개월 만이었고, 우리는 최단시일에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해낸 기록으로 세계 조선사(世界造船史)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1차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에 시작한 확장 공사로 ‘현대조선’은 1975년, 최대 선 건조 능력 1백만t, 부지 1백50만 평, 드라이 도크 3기 2백40만t 시설 능력을 갖춘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되었다.
세계 조선사에 기록을 남기면서 그렇게 빠른 시일 안에 조선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을 나는, 5천 년 문화 민족인 우리의 잠재력 발휘와 저력의 총화가 만든 결과라고 믿는다. 우리 한국인은 모두 작심만 하면 뛰어난 정신력으로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는 민족이고, 무슨 일이라도 훌륭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과 저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것은 계량할 수가 없는 무한한 힘을 가진 것이며, 모든 일의 성패가, 국가의 흥망이 결국은 그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정신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나는 조선소를 지으면서 절절하게 느끼고 배웠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바로 우리가 조국 근대화에 앞장선 전위 부대라는 일체감으로 똘똘 뭉쳐서, 낮도 밤도 없이 거의 3백65일 돌관 작업을 해냈다. 대부분의 임직원이 새벽에 일어나서는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는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구두끈도 못 푼 채 자고는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공사 기간 내내 그랬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 ‘현대’ 사람들의 그 투철했던 사명감과 강인한 정신력에 지금도 경의와 감사의 염(念)이 출렁인다.
나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했다. 서울에서 울산으로 갈 때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출발했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남대문 근처를 지나노라면, 어느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진지한 표정으로 길을 건너거나 지나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 풍경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목이 뜨끈하게 아파오고는 했었다. 불과 얼마 안 되는 하루 벌이에도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가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그 사람들의 엄숙한 현실이고 삶인 것이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삶이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 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나는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불끈 힘을 얻고는 했다.
비바람 몰아치는 칠흑 같은 밤, 혼자 현장을 돌다가 승용차를 탄 채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울산조선소를 만들 때가 아마도 내 일생에서 가장 활기찬 한 부분이 아니었던가 한다.
정주영회장 책속 이야기
부지런함으로 얻는 신용
무슨일을 하든지 일하는 데에 꾀부리는 버릇이 없는 나는 농사일에 비하면 일도 아닌 쌀가게 일을 하는 데는 우리 아버님이 농사일 하듯이 그야말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게으른 난봉꾼 아들 때문에 골치를 썩던 주인 아저씨는 열심히 되질과 말질을 배우면서 몸 안사리고 쓸고 치우고 배달하며 응대도 명랑하게 곧잘 하곤 하는 나를 기특해 하고 좋아했다.
주인아저씨는 돈은 많아도 배운게 없어서 장부를 쓸줄을 몰랐고 그저 잡기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만 적어놓으면 아들이 저녁에 와서 거래처별로 분개장에 옮겨 적고 재고 파악만 대강대강 하는 정도였다.
6개월쯤 되었을때 주인아저씨가 아들을 제치고 나한테 장부 정리를 맡겼다 그만큼 나를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엿공장에 취직했을때도 기뻤지만 쌀가게에 들어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
전차삯 5전을 아끼느라 구두에 징을 박아 신고 출퇴근을 하면서도 신이났고 생활이 조금 나아져 5전짜리 음식대신 10전짜리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을 때의 흐믓함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무일푼으로 고향을 뛰처나온 내가 당대에 어떻게 이처럼 큰사업을 이룰 수가 있었나 미심쩍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둘 것은 나는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가 아니라 한국 경제 사회에서 세계경제 사회에서 가장 높은 공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돈을 모아서 돈만으로 이만큼 기업을 이루려 했다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 했다
나는 현대를 통해서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일을 다 해냈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러했고 부산항을 비롯한 항만들이 그러했도 발전소들이 그러했다
만약 우리 현대가 그 역활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경제는 최소한 10년에서 20년은 뒤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은 한순간에도 정지라는 것이 없다. 쉬임없이 흘러 간다. 일 초가 모여 일 분이 되고 분이 모여 시간이 모여 하루가 지나간다
하루가 쌓여 일 년이 가고 십년이 가고 백년 천년이 간다
시간은 지나가 버리면 그만 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누구나 적당히 게으른 재미를 보고 싶고 편한 즐거움을 갖고 싶어한다
새도 부지런해야 좋은 먹이를 먹는다
비슷한 수명을 가지고 비슷한 일생을 사는 동안 어떤이는 남보다 열배 스무배 일하고 어떤이는 그 몇십분의 일도 못하고 생을 마친다
부지런해야 많이 생각하고 많이 노력해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부지런함은 자기 인생에 대한 성실성이므로 나는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일단 신용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고가 행복을 부른다
한창 잘먹고 자랄 나이에 밥보다는 죽을 더 많이 먹으면서 점심은 다반사로 굶어가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농사일을 할 때도 신통하게도 나는 내 처지가 불행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농촌의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이 고생을 하고 살아야 할까? 하고 비판한적도 없다
매사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여 느끼고 그 좋은 면을 행복으로 누릴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난 사람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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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한편 언제나 보다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느라 바빴지 한번도 좌절감이나 실망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 받은 타고난 건강에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근면함만 있으면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는 발전할 것이고 모레는 분명 내일보다 한걸음 더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행복했고 활기찼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었인가?
일단 재산 많은 부자면 행복한 사람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최선을 다해...... 자기 한테 맡겨진 일을 전심전력으로 이루어내며 현재를 충실히 살 줄 아는 사람은 우선 행복한 사람이다
훌륭한 발전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루하루 발전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발전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태어나는 환경,조건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똑같은 것이 있다 누구의 미래든...... 당신의 발전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발전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미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건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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